도쿄 출장 기록 Part 1. | 시간을 견디는 만듦새를 찾아서

Author:
Minji Kim
Published:
September 11, 2026
Category:
Journal

9월초 4박5일간 도쿄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처음엔 단순 휴가로 시작했다가 미팅이 잡히며 출장으로 변한 이번 도쿄는 오래동안 유지되고 변함없이 자신의 색을 보여주는 곳들을 많이 다녀왔습니다.

단단한 뼈대를 지닌 공간, 그리고 오랜 시간 손으로 만져도 질리지 않을 물건들을 다루는 곳들을 살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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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의 아르데코와 루시 리(Lucie Rie)의 도자기 | 도쿄도 정원미술관

1933년에 지어진 옛 아사카노미야 저택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시선을 천장과 벽면 구석구석으로 이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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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30년대 파리의 모던한 장식미술을 옮겨온 공간답게 르네 랄리크의 유리 공예 부조와 앙리 라팽의 벽화 등 공간 전체에 화려한 디테일이 살아있습니다. 하지만 그 화려함이 결코 들뜨지 않는 까닭은 일본 장인들이 세심하게 맞물려 놓은 단정한 목재 프레임과 반듯한 선들 덕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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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마다 형태가 전부 다른 샹들리에와 펜던트 조명들은 빛을 쏘아붙이기보다, 불투명 유리와 금속 프레임을 통해 부드럽고 우아하게 빛을 머금어 내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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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된 작품뿐만 아니라 공간을 천천히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시간 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손에 쥐었을 때 착 감기는 문손잡이의 정교한 이음새, 방마다 차분하게 톤을 가라앉혀 주는 카펫의 색감, 그리고 창가를 따라 알맞은 두께감으로 드리워진 커튼 사이로 부드럽게 스며드는 오후의 빛까지. 오랜 시간 사람이 직접 머물렀던 저택 특유의 온기와 세심한 마감이 공간의 품격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 단정하면서도 화려한 방들 한가운데 놓인 루시 리의 도자기는 얇고 곧은 선과 흙 본연의 질감만으로 공간과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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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0월에는 이곳에서 마리메꼬(Marimekko) 전시가 열린다고 합니다. 이 고전적이고 기하학적인 아르데코 방들에 북유럽 특유의 대담하고 생동감 있는 텍스타일 패턴들이 어떻게 어우러질지, 벌써부터 다시 찾아오고 싶을 만큼 기대가 남는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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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흙의 표면 | Pejite Aoyama

아오야마 골목 안쪽, 작은 맨션 1층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고요하게 숨어 있는 Pejite가 나타납니다. 마시코(益子)의 투박한 도자기와 오랜 세월을 거친 고가구를 다루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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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끈하고 완벽한 기성품 그릇들과 달리, 이곳의 도기들은 흙의 거친 알갱이와 유약이 자연스럽게 흐른 자국을 숨기지 않습니다. 들쭉날쭉한 손맛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찻잔과 접시들을 만져보며, 일상에서 매일 꺼내 쓰는 사물이 주는 소박한 위로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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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이 고운 나무와 손길의 흔적 | IFUJI 

진구마에 골목에 자리 잡은 IFUJI 쇼룸에서는 단정하게 깎아낸 셰이커 박스들을 만났습니다. 얇게 켠 원목을 부드럽게 휘어 맞추고, 작은 구리 못과 나무 핀으로 단단하게 이음새를 물린 상자들은 틈 하나 없이 정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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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차분한 색을 지닌 월넛 박스 하나를 구매했는데 어떻게 사용될지 기대 되네요. 손끝에 닿는 매끄러운 오일 마감과 앞으로 세월을 먹으며 더 짙어질 나무의 시간을 가늠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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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뒤편에 숨은 클래식의 무게 | 구 마에다가 저택(양관)

고마바 공원 안에 보존된 구 마에다가 저택에서도 비슷한 감각을 마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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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바 공원의 울창한 숲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면, 도쿄 한복판이라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묵직한 영국 튜더 양식의 대저택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1929년 옛 가가번 영주 가문의 후손인 마에다 후작이 지은 이 서양관은, 아르데코의 화려한 선이 돋보였던 정원미술관과는 또 다른 중후한 깊이감을 안겨줍니다.

현관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바닥부터 천장까지 짙은 원목으로 짜 맞춘 벽면 패널과 거대한 계단참, 그리고 정교하게 조각된 벽난로가 시선을 압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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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기교 대신 좋은 목재 본연의 단단함과 어둑하고 차분한 조도가 공간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특히 긴 복도를 따라 걸을 때 발밑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목재 바닥의 감촉, 창틀마다 두텁게 마감된 몰딩과 묵직한 황동 도어 핸들은 1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사람의 손을 타며 한층 더 그윽해진 광택을 머금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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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마다 걸린 직조 벽지의 차분한 패턴과 높은 격자창을 통해 은은하게 꺾여 들어오는 숲의 초록빛 그늘은 화려함을 뽐내기보다 거주자의 품위와 안락함을 우선했던 공간임을 조용히 증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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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을 좇아 쉽게 지어지고 사라지는 현대의 공간들 사이에서, 이처럼 좋은 자재와 정직한 만듦새로 시간을 견뎌낸 건축은 그 자체로 사물을 바라보는 기준을 다시 세우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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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맨션에 숨겨둔 방들 | Arts & Science (Palace Aoyama)

아츠앤사이언스는 카테고리마다 매장을 따로 운영하는데, 저는 아오야마 본점에서 의류와 가죽 가방제품을 둘러본 뒤 걸음을 옮겼습니다.

본점에서 10분 남짓 천천히 걸어가면 네즈미술관 바로 앞의 오래된 맨션(팔라스 아오야마) 1층에 알짜배기 공간들이 복도를 사이에 두고 문마다 전혀 다른 사물들을 마주할 수 있어 발걸음이 무척 편안한 동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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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COUNTER: 유럽의 오래된 약국 카운터처럼 물건을 꺼내어 보여주는 곳. 정갈한 식기와 커틀러리, Ifuji의 쉐이커 박스, 아츠앤 사이언스의 콜라보 인센스등 생활 도구의 쓰임에 집중하기 좋습니다.

HIN Arts & Science: 은은한 향(오리지널 인센스, 오일)과 함께 일본 국내외 작가들의 정갈한 공예품과 옻칠, 도자기를 소개하는 공간.

& SHOP: 남성복과 감도 높은 셀렉트 의류.

DOWN THE STAIRS: 계단 아래로 내려서면 만나는 카페 공간.

저는 OVER THE COUNTER에서 성냥처럼 톡 켜서 피우는 히비(hibi) 인센스를 골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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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중심의 메인 매장보다 일상의 냄새와 손에 닿는 기물들을 살피기에는 이 작은 복도만 한 곳이 없습니다.

카운터 너머로 물건을 정갈하게 꺼내어 보여주는 방식, 그리고 손님에게 물건을 건네는 사려 깊은 태도와 패킹 방식 하나까지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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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작은 셀렉트 숍에서 출발해 유행에 흔들리지 않고 20년 넘게 자신만의 기준을 지켜온 곳.

직접 물건을 고르고 공간을 꾸려가는 입장에서, 그 뚝심 있는 태도는 묵직한 배움이자 마음을 다잡게 하는 잔잔한 응원처럼 다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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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과 공간을 찬찬히 뜯어보며 걸었던 도쿄의 시간은, 결국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일상을 채워가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었습니다.

반짝이는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좋은 재료와 사람의 정직한 손길로 시간을 버텨낸 것들. 저택의 묵직한 문손잡이부터 한 뼘짜리 나무 상자와 그릇, 그리고 손님에게 물건을 건네는 사려 깊은 태도에 이르기까지, 그 단단한 뚝심들은 디애틱을 꾸려가는 저에게 오래도록 꺼지지 않을 조용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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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Part 2에서는 발걸음의 쉼표가 되어주었던 도쿄의 식당들과 이동 팁들을 담아보려고 합니다.